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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6-22 10:44
폭력의 원환 -한상희(건국대 법대 교수)
 글쓴이 : 삼성일반노조
조회 : 6,018  

- 법원의 명예훼손죄 유죄판결의 문제점

1. 들어가기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법을 새로이 만들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기존의 법을 보존하기 위하여 행사된다.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법정립적 폭력은 일단 그 위상을 확보한 다음부터는 그에 적대적인 대항 폭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법보존적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의 연쇄는 새로운 법이 정립될 때까지 계속되는 일종의 “마법적인 원환”을 그리게 된다. 폭력의 끝없는 변증법적 상승과 하강-이를 비판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 통치하는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법정립적 폭력을 거부하여야 한다. 우리는 또한 법보존적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에 이용되는 통치되는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삼성그룹의 무노조경영정책을 비판하고 그에 항거한 한 “삼성일반노조”원에 대하여 명예훼손의 죄책을 지우면서 그의 인신을 부산교도소에 구속한 법원의 판결은 이 점에서 우리의 무한한 거부 대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것은 명예훼손이라는 법담론을 조작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주의가 사라진 현재의 민주화국면을 삼성그룹과 같은 거대금력의 지배국면으로 재구성하려는 법정립적 폭력이거나 혹은 이미 완성된 재벌의 권력에 식민화되어 버린 사법부가 이 기성의 권력에 저항하는 대항담론을 억압하는 또다른 폭력이기 때문이다. 실제 신화가 신을 거역하듯, 이 사법부의 폭력은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명예권)이라는 헌법상의 기본권으로부터 발산되는 모든 신성성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밀턴은 출판의 자유에 관한 그의 열정을 선언한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진리와 거짓이 서로 다투게 하라. 어느 누구가 자유롭고 개방된 대결에서 진리가 패배하리라고 본단 말인가?”고 단언하였다. 하지만, 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이전투구의 싸움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곡의 현실을 우리의 사법은 의연히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2. 언론의 자유와 명예훼손
2-1. 명예훼손의 법리: 그 억압의 가능성
근대 입헌주의의 이념틀에 의하면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는 최우선적인 가치로서 인정되는 인권항목이다. 그것은 거짓된 논술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진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는 최적의 장치이거나 혹은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주정치의 실질을 담보해내는 수단이거나 혹은 인간이 다양하고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과정에 참여하여 자신의 인격을 마음껏 발현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자유, 혹은 그 중에서도 불특정다수인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알리고 그에 대한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자유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자 근대 이래 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 원리로서 인정되어 왔다.
하지만 권력은 이러한 표현의 자유 혹은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그리 관용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의미하며 권력에 대한 대항담론을 생산하는 참호가 구축될 수 있는 여지를 의미하며 종국에는 권력에 대한 전복의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이 자유에 대하여 보존적 폭력을 행사할 준비를 해 두게 된다.
명예훼손의 법리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은 본시 언론의 자유와 필연적으로 충돌하기 마련인 사생활-프라이버시와 명예의 보호를 위한 것으로 양자의 균형점을 사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서 자리매김되었다. 하지만, 그 사법의 권한을 전유하는 권력은 이 부분에서의 담론조작을 통하여 비판과 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비판과 대항의 진술들을 명예훼손이라는 범주로 포섭하고 여기에 사회적·법적 무가치 판단과 더불어 일정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미래의 저항가능성을 무화시키고자 한다.
“삼성일반노조”의 조합원 김성환씨에 대한 명예훼손사건은 이런 서술이 가장 조악한 형태로 현실화된 경우이다. 하급심의 판단이야 ‘미숙한 판사들’의 미숙한 판결이 판을 치는 우리 사법제도의 현실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차치해 버리더라도 법원중의 법원이 되어 있는 대법원에서조차 법리의 왜곡, 법담론의 조작, 혹은 논리의 비약 등의 방법으로 삼성그룹이 행사하는 반헌법적 권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억누르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2-2. 억압의 현실
우리나라에서의 명예훼손에 관한 법리는 다른 외국의 예에 비하여 언론의 자유를 신장함에 있어 상당히 소극적인 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미국연방대법원이 선언한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의 법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명예훼손을 손해배상의 문제로만 처리하고자 하는 미국과는 달리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이중적 법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명예훼손의 경우는 공인의 명예권, 인격권이라는 법익과 표현 혹은 언론의 자유라고 하는 공익적 성격의 법익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적 분쟁으로서의 특성을 지닌다. 이에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민사분쟁의 절차에 의하여 해결할 것이되,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형사적 문제로 처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사인소추제가 인정되는 영국의 경우 명예훼손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허위의 보도나 악의의 보도라는 요건에 더하여 그러한 보도에 의하여 공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이 공공의 질서를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고 있는가의 판단을 별도로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중적 법제를 취하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에도 명예훼손의 죄책은 주로 손해배상의 책임으로 처리하되 경우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명예훼손의 법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그것은 별다른 이유의 설시도 없이 미국의 ‘현실적 악의’의 법리를 배척하면서 일반적인 불법행위 또는 범죄행위의 법리와 별 차이 없는 방식으로 명예훼손의 문제를 처리한다. 즉, 명예훼손에 관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함에 있어서도 고의·과실의 문제를 일반적인 손해배상사건과 다르지 않게 처리할 뿐 아니라 형사책임을 부과함에 있어서도 보도자에 대하여 사회평균인과 같은 정도의 주의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언론보도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오류 혹은 하자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엄중 처벌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점은 이를 다루는 우리 법원의 태도에 있다. 명예훼손을 민사상 손해배상의 책임만으로 처리하지 않고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중적 법제에 걸맞는 차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제 언론보도에 대하여 적용되는 출판물등에 의한 명예훼손죄(형법 제309조)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만큼 강력한 형사적 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형사적 처벌은 그대로 현실에서도 주효하여 상당히 많은 경우 실형까지 부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형사적 처벌을 가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경우처럼 손해배상의 경우에 비하여 보다 엄격한 요건을 부가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법원은 이 엄격성을 형법 제310조의 위법성조각사유의 해석으로써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의하면 비록 명예훼손의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는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비방할 목적은 부인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함으로써 그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추상적 유보조항을 달아 둠으로써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예정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 법원이 언론에 대하여 가지는 권력성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명예훼손에 관하여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을 구획하지 못하면서도 그 요건판단에 있어 상당한 재량여지를 스스로의 권력내에 유보해두고 있는 검찰과 법원의 이런 태도로부터 우리나라의 언론의 자유는 최소한 사법권력의 지배로부터 혹은 그 사법권력을 압도하는 또 다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3. 언론의 자유와 사법권력
3-1. 문제의 소재
이 점은 김성환씨의 사건에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우선 이 사건이 가지는 문제점의 첫째는 이미 설명한 바대로 형사사건으로서의 명예훼손죄의 판단과정에 민사사건으로서의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에 대한 법리가 아무런 여과없이 적용되었다는, 우리 법제상의 일반적 하자 그 자체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법제 자체의 문제이며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김성환씨의 사건 그 자체의 하자로 거론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문제는 법원 특히 대법원이 명예훼손죄에 관한 그 나마의 법리조차도 제대로 검토하거나 적용하지 않은 채 성급하고도 조악하게 유죄의 판결에 이름으로써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보였던 행태를 거듭 반복하는 과오를 범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 점은 김성환씨가 쓰고 게시한 글의 내용이 “진실한 사실”에 해당하는가의 판단과 “비방할 목적”의 존재에 관한 판단 모두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3-2. “허위의 인식”의 허위
대법원은 “방화사건이 발생하자 그 사건의 경위나 내용에 관하여 충분한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자신이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사실을 왜곡한 글을 게시하였고” “그 적시된 사실의 내용 전체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그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지 않은 허위인 사실이 인정되며” “피고인에게 그 허위의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지지 않아” 피고인에게 허위의 인식이 있었다고 판단한 원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대법원의 태도는 지나치게 형식논리로만 일관함으로써 현실적인 역관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계요인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하자를 안고 있다. 우선, 명예훼손죄의 요건인정에 있어 김성환씨가 적시한 사실관계가 그 중요한 부분에 있어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의 여부의 판단은 우선은 피고인인 김성환씨의 인식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피고인이 어떠한 사건을 인지하고 그 인과의 연관을 추적함에 있어 고의나 과실이 없이 공정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를 인용하였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일단 비난의 가능성이 줄어들 뿐 아니라 최소한 형사적 책임에 대한 면책을 인정할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사건의 경우 적시된 사실에서 문제된 부분은 삼성SDI측이 노사협의회 선거에 개입하였는지와 박모씨가 방화에 즈음하여 분신을 기도하였는지의 여부이다. 전자의 사실과 관련하여서는 ①이미 선거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회사측의 개입을 언급한 바 있으며 ②울산인권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서도 진상조사의 과정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③부산지방노동청에 대한 국정감사의 과정에서도 회사의 선거개입의혹을 제기되어 부산지방노동청 차원의 재조사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첫째 김성환씨가 적시한 사실관계가 진실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판단은 논리적 비약이 있을 뿐 아니라, 둘째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다고 본 대법원의 판단 기준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 이 사건은 삼성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조직이 자행한 것으로 보이는 비리를 지적하고 이를 사회일반에 고발하는 한 개인의 저항이 그 실체를 이룬다. 여기서 두 당사자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력의 차이는 일반적인 언론기관의 취재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도저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그래서 비록 김성환씨가 “사실”로서 적시한 행위가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되지 않는 시점에” 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위의 ①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진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진실성 내지는 신뢰성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의 인정여지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만일 진실임을 증명하는 보다 확실한 증거나 조사행위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재벌과 같은 거대조직의 비리 혹은 그 혐의에 대하여 시민사회는 눈감을 것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게 된다. 정보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는 거대조직을 상대로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은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록 사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적시의 대상이 된 사건에 대하여 진상조사에 나선 시민단체(②)나 공공기관인 부산지방노동청 혹은 국회의원들까지도 같은 취지의 인식을 제시하였음(③)을 감안할 때 최소한 김성환씨에 있어서는 그 적시한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를 부인하여야 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게 된다. 환언하자면 김성환씨가 조사한 사실관계의 내용이 시민단체가 진상조사를 하여 발견한 사실관계의 결과와도 일치할 정도라고 한다면 적어도 개인의 수준에서는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과실 없는 노력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 점에서 그에게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사실관계는 방화사건에 관여된 박모씨의 진술을 그대로 신뢰하고 이를 게시판에 적시하였음에 집중되어 있다. 대법원이나 그가 인용한 원심법원은 이를 두고 그가 ‘적극적으로 분신을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신기도방화사건”이라고 유포한 점이 과장된 표현으로써 허위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표현은 그 자체 명예훼손의 형사책임까지 부과할 수준의 무가치행위에 해당된다고 보기 힘들다. 우선 “피해자”인 삼성SDI측이 KBS방송국의 취재진에게조차 현장의 공개를 거부하고 부상직원에 대한 접근을 막는 등의 은폐조치를 취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정보력이나 자료의 수집능력이 그보다 훨씬 미약한 김성환씨의 입장에서 당사자의 진술에 의존하고자 하였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죄의 판단을 내린 대법원의 태도는 한 여성단체가 성폭력 피해 여학생을 상담한 결과를 바탕으로 가해자를 밝혀 인터넷 게시판에 적시하는 한편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여성단체들의 성명이나 주장내용들을 옮겨 게재한 행위를 무죄로 선고한 선례와 전혀 대비된다. 뿐만 아니라 정당의 대변인들의 논평이 “어느 정도의 단정적인 어법도 종종 사용되고 이는 수사적인 과정표현으로서 용인될 수도 있”다고 본 판단과도 자못 괴리된 것이기도 하다. 즉 대법원은 “정당의 정치적 주장에 관하여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단정적인 어법 사용에 의해 수사적으로 과장 표현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구체적 정황의 뒷받침 없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정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쉽게 그 책임을 추궁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단언하고 있음에도 정당에 못지 않는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노동조합과 노동인권이 달린 이 사건에 관한 한 이러한 유보적·관용적 태도를 아무런 이유 설시도 없이 철회하고 있다.

3-2. “공공의 이익”-그 강요된 부재
대법원의 판결이 지니는 또 다른 문제점은 비방목적의 존재여부에 관한 판단에 있다. 명예훼손죄의 위법성을 조각하는 사유로서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경우”에 관한 그동안의 대법원의 태도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대법원은 이를 “적시된 사실이 객관적으로 볼 때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 동시에 “행위자도 주관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그 사실을 적시한 것”이면 명예훼손의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공공의 이익”이란 일반 다수인의 이익에 관한 것뿐 아니라 특정한 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민지원기금의 횡령혐의사건에 대하여서는 그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 및 기금의 적절한 운용의 촉구라든가 성폭력혐의사건에 대한 수사기관과 학교당국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처벌의 촉구 등이 “공공의 이익”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김성환씨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제시한다. 대법원은 김성환씨가 이 사건에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졌었는지에 대한 사실판단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피고인의 주관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이를 “과장”하고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하여 구체성을 띤 사실을 적시한 점”,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일정한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점, “인터넷 게시판을 사용한 점” 등 그의 행위태양만 열거한 다음 곧장 “피해자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보기나름으로는 외형적 행위만으로 김성환씨의 의도와 목적 등 내면을 추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법원이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김성환씨가 이 사건 행위를 하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인 삼성그룹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여왔으며 그것을 어떠한 방식의 행동으로 이전해 왔는지의 문제이다. 그동안 그는 삼성그룹의 무노조경영전략이 가지는 반인권성, 반노동자성을 고발하고 그 탄압사실과 사례들을 모아 ‘삼성재벌노동자탄압백서’를 발간하고 여타의 노동단체, 인권단체들과 그 성과를 공유하면서 그 시정을 촉구하고 노동인권의 실천을 추구하였음은 약간의 자료조사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 진술 역시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임은 더 이상의 논증이 불요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대법원의 판단에서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과장”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등의 요소만을 강조하여 이로부터 직접 “비방의 목적”을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역시 대법원의 종래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대법원은 한 판결에서 “행위자의 주요한 동기 내지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수적으로 다른 사익적 목적이나 동기가 내포되어 있더라도 형법 제310조의 적용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과장”이나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이 혼재된 표현에 대해서도 의연히 면책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왔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런 부분에 대한 판단은 전혀 없이 단순히 “과장”에 의한 표현이기 때문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인정하며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과는 무관한 표현이라고 단정하고 있을 뿐이다.

4. 폭력의 원환
우리나라는 미국의 현실적 악의의 법리와 같이 폭넓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언론의 자유를 최우선적 자유로 보장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약하고 억제하는 국가법의 집행은 가능한 한 최소한에 그쳐야 함은 다른 인권선진국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특히 그것이 단순한 손해배상의 책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신의 구속까지도 예정되어 있는 형사책임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삼성이라는 거대기업의 노동자탄압정책에 항거하였다는 이유로 김성환씨에게 부과된 명예훼손의 죄책은 이러한 일반론의 예상을 큰 폭으로 뛰어 넘는다.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왔던 관용의 정도조차도 부인하면서까지 김성환씨에게 명예훼손의 죄책을 부과하고자 애 쓰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인정의 방법을 변용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법성조각사유의 인식방법까지도 달리 처리한다. 그리고 이런 무리한 법적용을 통하여 거대권력에 항거하는 개인의 처절한 노력마저도 법금(法禁)의 대상으로 치환해 버린다.
실제 이런 대법원의 입장이 계속되는 한, 대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치닫는 현재의 국면에서 개개인의 인권을 실천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권력이 사라진 공백을 경제권력이 대체하고 이 경제권력과 법권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유착관계를 구축하는 이 시점에서 그래서 인권을 침해하는 최대의 적이 경제력을 장악한 기업이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경제권력의 비리를 고발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대중적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최우선적 거점이 바로 언론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언론자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breathing space)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시민들이 이런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참호 하나를 처참히 봉쇄하고 있다. 한 개인이 자신의 모든 역량과 정보를 동원하여 거대기업의 비리를 적발해 내고 이를 시민사회와 더불어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노력 그 자체가 명예훼손이라는 편협한 법리의 조작에 의하여 처절하게 무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은 시대역행적일 뿐 아니라 반주권적이다. 사회와 시장의 건전성을 확보해내고 인권의 실천을 담보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을 그 첫 단계에서부터 봉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전시대의 정경유착을 대신하여 새로이 등장하는 법경유착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새로이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법정립적 폭력의 주체로 등장하는 거대기업의 주변부에 위치하여 그에 대한 대항의 노력을 분쇄하기 위한 법보존적 폭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벤야민의 명제를 다시 한 번 되씹게 된다: “우리는 (……) 통치하는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법정립적 폭력을 거부하여야 한다. 우리는 또한 법보존적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에 이용되는 통치되는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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