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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03 00:56
한 논문에서 퍼온글입니다... 재벌의 형성 그리고 자본축적에 대한 논문이더군요,,
 글쓴이 : ㅋㅋㅋ [61.♡.15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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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자본축적사

 상업자본가, 1938-1948

A. 일본식민지 기간, 1910-1945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의 사회적 배경은 지주계급이다. 아버지의 재산은 매년 1천 석을 넘는 쌀을 수확하는 지주였다고 한다. 이병철이 아버지에게 사업을 세울 의도를 밝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매년 3백 석의 쌀수확" 가치에 해당하는 자원을 대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이병철은 적고 있다. 하지만 이병철은 그 돈은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나 "좋은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좋은 사업이 어느 정도 규모의 사업이었는지 짐작하기 쉽지는 않으나, 그가 시작부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사업을 고려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병철은 그 자금으로는 서울(경성)에 근거를 둔 사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서울의 일본인 소유의 사업에 경쟁할 만한 사업을 세우기에는 아버지에게 받은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 그럼에도, 이병철이 사회적으로 상류 토지 귀족 출신이며, 그가 토지에서 나온 얼마간의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병철, 1986: 24). 어떤 의미에서는 이병철의 사업은 토지자본이 상업/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좋은 예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지로부터의 자본이전이 1936년 이후로 계속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병철의 사업활동이 토지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고전적인 예는 되지 못한다.5)


현재 한국의 대표재벌 4개중 3개의 창업자가 일본식민지 시대에 사업을 처음 시작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현대의 정주영이 그들이다.


일본식민지하에서 이병철은 1936년6) 정미소에의 투자로 사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 그의 첫투자는 정미소였다. 이병철이 정미업을 시작한 이유는 식민지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당시 정미소는 농부에서 소비자에게로 미곡이 이동하는 흐름의 중심에 위치했다. 이병철은 쌀이 한국의 주된 농업 생산물이며 일본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인 것을 염두에 두었움이 짐작된다. 이병철이 처음 투자한 정미소가 위치한 경남 마산은 일본으로 미곡을 실어나르는 주요 항구였다. 이병철과 다른 두 사업가가 공동으로 1만원씩 모두 3만 원을 투자했다. 마산의 최고 정미소를 만들기에 3만 원은 부족한 자금이어서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 돈을 대출 받는다. 이병철이 그의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부족한 자본을 은행에서 빌려서 메우고, 그것도 한국내 일본은행으로부터의 자금을 이용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러한 자금동원 형태는 1950년대 1960년대의 삼성이 주요 투자재원을 국내은행뿐 아니라 일본기업과 은행에 의존하는 것으로 후일에 반복되어 연결된다.


1938년 6월 이병철은 운송회사를 인수하여 운송업에 뛰어든다.7) 그의 운송사업은 일본식민지 말기 연료공급 부족이라는 사태를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곤란에 처하게 되고 실패한다. 그 뒤 마산에 위치한 조선식산은행에서 빌린 자본으로 이병철은 토지에 상당히 투자한다. 사업시작부터 어떻게 은행대부를 이용하여 자금부족을 메우며 어떻게 은행자금을 최대한 이용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기업내부유보보다는 차입자본에 의존했던 것이다. 일본은행들의 과잉대출이 이병철이 충분한 자금을 이용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였다. 1936년의 대공황의 여파로 은행들이 이자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졌고, 소규모 지주들은 은행에서 대부를 얻기를 주저했었다. 따라서 은행들은 믿을 만한 대토지 지주들에게 중점적으로 대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토지소유에 대한 수요가 줄어 있었다. 토지가격이 낮고 자금이 충분하다는 조건이 맞아떨어져 이병철은 토지인수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고부터 상황은 바뀌었다. 조선식산은행이 전시산업을 제외하고 일반대출을 거의 중단한 것이다. 후일 이병철은 자신이 토지에 과잉투자한 실수를 인정한다. 한국거주 일본인 대규모 토지소유자들이 당시의 상황변화를 예측하고 낮은 가격으로 토지를 매매한 것에 이병철이 속은 것으로 보인다. 이 경험으로 이병철은 투자에 보다 이성적이고 조심스럽게 된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병철은 1938년 3월 1일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한다.8) 삼성상회는 만주와 북경에 국내산 과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삼성의 삼三자는 "크고 강하다"는 뜻으로 사용했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여서 택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었던 일본재벌인 三井(미쓰이)과 三菱(미쓰비시)에서 삼三자를 빌려 온 듯도 싶다. 성星자는 별이라는 뜻으로 밝고, 높고, 항상 빛나며, 깨끗함을 의미했다9) (삼성비서실, 1988: 90). 삼성상회의 초기자본은 3만 원이었다. 3년 3개월 뒤인 1941년 6월 3일 삼성상회는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붙여 현대화된 경영체재를 갖췄다는 것을 반영했다 (삼성비서실, 1988: 92).


일제통치하에서 1945년까지 이병철은 소규모 기업가로 운수업, 부동산업, 무역업, 정미업, 그리고 양조업으로 사업을 다양화했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참여한 사업은 무역업이었다. 무역업에서의 이익으로 이병철은 양조업에 투자한다. 가내에서의 주조가 금지되어 있었고 양조장의 수가 식민지정부의 허가 때문에 제한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조선양조(1939년 인수)는 이익을 상당히 많이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삼성오십년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中 日戰爭이 날로 擴大되어가는 가운데 모든 景氣가 沈滯局面에 있었지만 釀造業만은 好況을 누리고 있었다. 특별한 販促戰略이 필요없고 주어진 割當量만을 生産하면 절로 팔려 나갔다. 더욱이 日帝의 稅收확보를 위한 密酒단속은 好景氣를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삼성비서실, 1988: 92).





그러나 양조업의 이익도 2년이 지속되지 못했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식민정부는 주류생산의 95퍼센트를 몰수했고, 가격을 심하게 통제하였던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사업시작부터 이병철이 다루었던 사업의 종류가 꽤 다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삼성의 예로 보아 기업이 초기부터 여러 사업에 개입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것이 한국재벌 투자의 한 특성인 다각화이다. 사업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이병철은 사업의 중점을 변화시키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업자본가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업의 성공이 기술이나 상품의 혁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새로운 이익 사업에 뛰어드느냐에 달렸었다. 시장이 충분히 개척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련기업으로의 다각화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에 환경의 수요에 맞추는 새로운 "운좋은" 사업들을 찾는 것이 보다 중요했다. 이것이 한국재벌의 투자가 보이는 한 특징이다. 사업이 상승 기류를 탈 때, 자신들의 모든 자원을 투자하여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독점이나 과점으로 다른 경쟁자들, 특히 중소 기업들을 제거하고 최대한 이익을 취한다. 사업이 하강 기류를 탈 때는 그 사업을 최소한의 규모로 줄여 유지만 한다.10) 이 사업이 다시 새로운 상품개발에 의한 급격한 구매자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면, 생산라인을 빨리 증가시키고 투자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일제당의 경우 초기에 제당업에 투자하여 사업 첫 몇 년 동안(2년간)에는 독점의 지위를 누린다. 제당업에 경쟁자가 생기고 설탕의 수요가 줄어들자, 제당업을 유지하면서 제분업에 뛰어 들고, 이후에는 제당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화학 기술을 계속 개발시켜 1978년에는 유전공학biogenetic과 제약산업으로 다각화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정부의 유전공학 산업진흥계획은 이보다 훨씬 늦은 1982년에 시작되는데 정부의 지원을 예상한 투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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