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독재 연재 2부 이건희 시대 자본을 해방시킨 민주화

이건희 시대의 삼성은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해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권력에서

직접 사회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본독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자본을 해방시킨 민주화 그리고 삼성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정착되었고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고 그와 함께 정권의 정통성 시비는 사라졌다. 

하지만 군부독재로부터 벗어난 것은 국민만이 아니었다. 

재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재벌의 정경유착 대상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민주정부였다.

정경유착의 대상이 군부독재정권에서 민주정부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재벌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이었다. 

하나는 군부독재정권에 비해 민주정부 아래서 기업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민주정부의 정통성이 재벌과 정부의 정경유착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

는 점이었다. 

재벌에게는 정통성과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던 군부독재정권보다는 민주정부가 훨씬 훌륭한 정경유착의 파트너였던 것이다. 재벌은 군부독재정권에 ‘기생’하는 세력에서 정경유착의 형식과 내용을‘주도’하는 세력으로 거듭나기를 원했고, 무단통치를 일삼던 절대 권력이 사라진 공백을 자신들의 권력으로 채우고 싶었다. 

민주주의의 비극적 역설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가장 발 빠르게 적응하며 움직인 것은 역시 삼성의 이건희였다.

이건희는 ‘문민정부’초창기, 즉 1993년 3월부터 4개월간 1,800여 명의 임직원과 함께 세계 주요 도시를 방문했다. 그 기간에 언론은 이건희의 발언 내용 하나하나를 낱낱이 알렸다. 이건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의 ‘선언’이었다.

6월 1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럽 주재원 간담회를 가지면서 이건희가 말한 몇 마디를 언론은 ‘프랑크푸르트선언’ 혹은 ‘신경영 선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업가의 고압적인 말 몇 마디를 언론이 “세기적 선언”으로 칭송하는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이건희의 발언은 직설적이었다. 그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 라고 윽박질렀다. 간결한 메시시였다. 그러면서 포괄적인 개혁을 선언했다. 

심지어 인간성 개조를 언급하기도 했다. 개혁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이건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이 불쌍해서다. 안 도와주면 죽을 것 같아서다.”

이건희는 시혜를 베푸는 황제 같았다. 이건희의 일거수일투족에 언론은 춤을 췄다. <MBC>는 7월 31일 삼성그룹 사내용으로 만든 이건희 훈시 비디오를 90분간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다. <MBC>사장의 특별 지시였다. “내 말을 적어도 50번 이상 반복해서 테이프를 통해 들어라. 자꾸 들어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라고 이건희가 강조하던 비디오였다. 전 국민이 ‘사외직원’이 되어 이건희의 훈시를 들은 셈이다.

승용차 사업 진출

이건희는 1993년 1월 4일 신년사에서 기업 홍보를 “기업 생존 전략의 하나” 로 볼 정도로 강조하고 ‘홍보 정치’라 할 수 있는 언론플레이를 탁월하게 수행했다. 

그 효과를 본 것일까? 삼성은 언론의 협조를 발판으로 ‘이건희 신드롬’을 일으키며 승용차 사업 진출에 성공했다.

삼성은 노태우 정권 시절부터 승용차 사업 진출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승용차 사업을 하고 있던 현대, 기아, 대우, 쌍용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과잉 중복 투자 문제를 지적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 이르러 다시 삼성의 승용차 진출이 쟁점이 되었다.

1992년에 삼성은 상용차 사업 진입을 허가받자 연이어 1993년 승용차 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994년 초반부터 삼성은 언론플레이를 하며 승용차 시장 진출을 꾀했다. 상공자원부는 삼성의 승용차 사업에 대한 신규 투자를 허가하지 않았지만 이건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에는 이건희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었다. 삼성그룹 안에 ‘21세기 기획단’을 만들어 승용차 사업 진출에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부산 지역은 일찌감치 삼성차 유치 운동을 벌였다. 

삼성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부산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다음 부산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느냐” 라는 식의 부산 여론을 부추겨 김영삼의 마음을 바꾸려는 전략을 세웠다. 삼성은 부산에 전무급 이하 4명의 임직원을 상주시키고 부산 지역의 상공인, 정치인, 지역 관료들과 접촉했다. 또한 조직을 가동해 청와대와 중앙 정치권에 끊임없이 로비를 벌였다.

삼성의 로비는 강력하고 철저했다. 삼성은 기무사의 ‘존안카드’같은 인물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활용했다. 

여기에는 정계인사는 물론 사무관급 이상의 중앙 부처 공무원과 과장급 이상의 지방 공무원, 언론인 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관련있는 사내 인사들의 친분 정도를 ABC등급으로 매겨 ‘유사시’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부산을 가꾸는 모임’이라는 단체가 삼성차 유치 10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국제신문>은 “삼성차 부산에 와야 한다” 라는 기획 기사를 1994년 8월부터 개재하면서 지역 여론을 부추겼다. 여론에 편승해서 부산시장, 부산상공회의소, 부산 지역 국회의원들이 나섰다. 삼성이 14조 원에 이르는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지역 여론은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1994년 10월 개각에서 부산 출신이 대거 진입하고 11월, 김영삼의 세계화 선언이 제시되면서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을 반대하던 정부의 입장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영삼 정부를 압박했다. 이를테면 김영삼의 조깅화가 외국 유명 업체의 신발이라는 것을 트집 잡아 이것을 국내 신발 산업의 본거지인 부산의 경기 위축에 대비했다. 결국 12월 2일, 정부는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에 삼성승용차 공장의 입주를 허용하게 되었다.

삼성차 문제는 업종 내 반발뿐만 아니라 지역 간 갈등까지 불러 일으켰다. 

공장이 부산에 세워질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이 반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삼성은 광주⦁전남 지역에 총 4조 원의 투자 계획을 내놓았다. 

이렇게 삼성은 다른 지역에 여론을 토닥이며, 1995년 3월에 회사를 차리고 1996년 11월에 공장을 건립했다. 이건희는 공장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직접 공장을 방문해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생산 준비 작업을 세세하게 보고받았다.

삼성의 승용차 진출은 독재정권이 특혜를 주고 허락한 사업에 기생하던 재벌이 정부의 반대를 정면으로 받아치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 사례였다. 삼성의 정치, 경제, 언론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확인하는 사례였고, 삼성권력이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삼성권력에 힘을 실어준 것은 역시 언론이었다. 

언론은 이건희의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언론 덕분에 이건희 신드롬은 1995년에도 계속되었다. 

언론은 정치권력을 제치고 삼성을 사회의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가 삼성을 우러러봤고 삼성은 정치권력에 비교 우위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1995년 4월 13일, 이건희는 북경에서 “문민정부에서 행정 규제가 많이 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완화된 것 하나도 없다”라며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 한국의 정치는 4류이고, 행정과 관료는 3류이며, 기업은 2류이다”라고 말했다. 

기업이 세계 일류는 아니지만 정치와 행정은 그보다 더 낮아서 기업 운영에 걸림돌이 된다는 뜻이었다. 일찍이 금융실명제에 기업 경영의 걸림돌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개혁 정책을 흔들었던 이건희는 더욱 강력하게 정부의 개혁 조치를 비판하고 정부와 기업의 관계에서 기업을 우위에 세우려 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냉소를 밑거름 삼아 기업의 위상을 추어올리려는 전략이었다.

나아가 이건희는 시민의 정치에 대한 불만을 매개로 시민과 삼성을 같은 진영으로 묶어내고자 했다. 

이를테면 이건희는 “삼성과 정부에 대해 밀월 관계라는 말도 있지만 가장 적대적인 관계이다. 자동차 허가도 부산 시민이 반발하니까 내준 것 뿐”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삼성이 부산 시민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비추고 삼성을 정부에 대항하는 사회 연합의 중요한 축으로 포장하는 데 매우 성공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김영삼은 이건희의 발언에 발끈했지만 언론은 삼성을 추어올리는 데 더욱 열을 올렸다. 이를테면 <KBS>는 1995년 9월 21일 9시 뉴스에서 ‘대기업의 지방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이건희의 부산 공장 나들이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군부독재정권 시절에 군부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언론은 이제 삼성의 홍보 부대로 변해 있었다. 절대권력의 공백을 차지한 새로운 주인이 누구인지를 언론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삼성이 실제로 정치를 냉소하거나 혐오한 것은 아니었다. 삼성은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정경유착의 메커니즘을 더욱 세련된 자기 주도 방식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삼성은 국민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조장함으로써 정치적 무관심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개혁의 사회적 동력은 떨어졌다. 국민의 정치 무관심과 감시 소홀에 힘입어 삼성권력은 더욱 강해졌다.